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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정세] 세계 3위의 산림황폐화 위험국 북한 -우리 산림녹화 성공 경험 전수하는 북한 산림녹화 사업이야말로 남북관계 영향이 클 것
[북한정세] 세계 3위의 산림황폐화 위험국 북한 -우리 산림녹화 성공 경험 전수하는 북한 산림녹화 사업이야말로 남북관계 영향이 클 것
[정치닷컴/휴먼리더스=김규남] 북한의 김정은은 집권 첫해인 2012년 모든 산을 10년 안에 '황금산', '보물산'으로 만들겠다는 국토관리 방침을 발표한 바 있다. 또한 지난 2015년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명의로 산림 관련 노작을 발표하자 내각이 「산림복원 관련 결정서」를 채택하는 등 북한이 산림복원사업에 나서기 시작했다. (사진출처 : 한국임업진흥원) 실제로 북한의 산림황폐화 지수는 매우 심각하다. 2017년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북한의 임야는 2011년 553만 헥타르(ha)에 달했으나, 김정은 집권 첫해인 2012년 541만 ha, 2013년 528만 ha로 추산된다고 밝힌 바 있다. 또한, 2013년 「인간개발지수」에 따르면 북한의 산림면적은 지난 20년간 30%이상 감소한 것으로 발표되었으며, 이와 관련하여 최근 영국에서 발표된 산림황폐화 지수에 의하면, 북한은 전 세계 180여 개국 중 나이지리아, 인도네시아에 이어 세계 3위의 최고 위험 국가에 속해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산림의 황폐화는 북한 생태계를 무너뜨리는 주범이기도 하다. 세계은행(World Bank)의 보고에 따르면, 2015년 기준 북한 산림황폐화로 인하여 포유류 9종, 조류 27종, 어류 17종, 식물 8종 등 총 61종이 멸종위기에 처해있으며, FAO가 발표한 2011년 「세계 산림현황 보고서」 에서는 산림면적의 감소에 의해 이산화탄소 흡수량이 1990년 2억 3천900만 톤에서 2010년에는 1억 7천100만 톤으로 약 30% 줄었다고 한다. 북한의 산림이 이렇게 계속적으로 황폐화된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북한이 주장하는 대로 6.25 전쟁 시기 미군의 폭격에 의해 산림이 파괴되었다지만, 그보다도 중요한 원인 중 하나는 땔감 확보를 위해 북한 당국과 주민들에 의한 무차별적인 산림의 남벌과 목탄차의 운행, 외화 벌이를 위한 목재의 수출 그리고 다락 밭이 주요 원인으로 보고되고 있다. 기존에 알려진 북한의 다락 밭 개간은 1970년 중반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3년 김일성은 최초 다락 밭 개간을 지시했는데 70년대 초반까지는 적극적으로 장려되지 않다가, 1976년 자연개조 5대 방침에 따라 본격화되었고, 1990년대 중 · 후반 고난의 행군 시기에는 더욱 무분별한 남벌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현상은 곧 산림 파괴로 이어져 1990년대 중반에 시작된 자연재해로 가뭄과 최악의 홍수피해 발생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에도 1995년 9월 19일 평양방송은 오히려 다락 밭 건설을 비롯한 이른바 자연개조사업이 김정일의 치적이라고 선전했다. 결국, 김일성이 시작하고 김정일이 마무리 한 북한의 다락 밭 건설 사업 결과는 산림의 황폐화라는 연장선상에서 연속적인 피해의 도미노가 일어나, 식량 및 에너지난이 반복되어 가중되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사진 촬영 : 평양 일대, 임상철 상지대학교 교수. 필자의 스승 ) 북한의 산림녹화 계획 추진은 1990년대 말부터 강. 하천 정리 사업을 전개하면서 2000년에는 '산림조성 10개년 계획'을 마련해 160만 헥타에 조림사업을 벌였으나, 현재 북한의 전반적인 사회 시스템이 조림과 육림을 통해 재해를 막기에는 역부족인 상태이다 보니 산림은 계속 감소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국립 산림과학원은 2008년 기준, 황폐된 북한 산림 284만 헥타 복구에 약 32조 원 이상 소요될 것으로 전망했다. 이 중 조림 비용은 약 7조(2680억) 원이지만 사방사업에 약 23조(4140억) 원이나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고, 양묘장 조성 (5410억 원)과 그에 따른 부대비용도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제 북한 산림복구비용은 시간이 갈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민둥산에 비가 오면 쓸려 내려가다 보니 지력이 점점 약해져 나무를 심어도 그만큼 활착률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자연재해에 따른 피해도 늘어날 수밖에 없는데, 독일 환경단체인 「저먼워치」는 ‘지난 20년간 북한에서 37건의 대형 자연재해가 발생하여 국내총생산의 8%에 이르는 피해를 본 것으로 발표’한 바 있다. 북한은 최근 그동안의 산림정책의 실패를 인정하고, 산림녹화의 의지를 보이고는 있는 점은 매우 고무적이다. 거슬러보면 김정은은 지난 2012년 4월, 산림복원 10개년 계획 지시에 이어 해마다 신년사를 통해 나무 심기를 전 군중적 운동으로 벌일 것을 강조했다. 그들의 목표는 2023년까지 무입 목지 168만 헥타에 총 65억 그루의 나무를 심는 것으로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성은 떨어지지만, 산림복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는 점은 매우 다행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북한 당국이 산림녹화를 강조하고는 있지만 자체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전문가들은 전망한다. 최근에도 김정은이 산림을 복구한다는 명목으로 뙈기밭에 대한 농사 금지조치로 당장 식량 조달원이 없어진 주민들은 생계가 막막해하는데 배급제가 끊긴 상황에서 산에서 식량과 땔감을 조달하던 일부 북한 주민에는 생존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계를 위협받고 있는 주민들이 땔감 채취와 다락 밭과 뙈기밭을 포기하면서까지 나무 심기에 적극 참여하지 않기 때문에 북한당국도 이러한 상황 인식하고 있다.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 2015년 북한의 식수절(3월 2일)에 앞서 김정은은 “고난의 행군 시기부터 식량과 땔감을 해결한다고 하면서 나무를 망탕(되는 대로 마구) 찍은 데다 산불방지 대책도 바로 세우지 못해 귀중한 산림자원이 많이 줄었다.”고 말했다. 북한 정권은 오류를 인정하지 않는 무오류 집단인데 산림 황폐의 현실을 이처럼 적나라하게 인정한 것을 보면 북한 당국도 산림 황폐화의 심각성을 인식하여 작지만 복원하려는 의지는 있다고 보인다. 이미 우리가 경험했듯이 산림녹화 성공의 관건은 조림과 육림이 가능한 시스템 구축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1972년에 입안한 국토 조림녹화 10개년 계획은 새마을운동과 연계하여 녹화와 소득증대 사업을 결합시킨 종합 접근법을 적용한 것은 ‘식량과 연료대책을 세우지 않고서는 산림녹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제 북한도 산림녹화를 위해 선행되어야 할 것은 ‘먹는 문제와 에너지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는 것이 가장 시급 한 문제이다. 이를 위해 우리의 산림녹화 성공 경험을 전수하는 북한 산림녹화 사업이야말로 남북관계 개선에 영향이 클 것으로 본다. 남과 북이 서로 민감하지 않은 분야에서부터 신뢰관계가 형성된다면 향후 경제적인 부분과 정치적으로 큰 도움이 될 것이며, 북한의 산림녹화 소요를 고려해볼 때, 이러한 주민이 직접 참여하는 장기계획으로 추진된다면 산림녹화 사업을 계기로 전반적인 협력을 강화하는 것도 충분히 기대할 수 있어 남북관계 개선과 더불어 통일을 앞당기는 마중물이 될 것이다. 물론 넘어야 할 벽도 만만치는 않다. (사진출처 : 평양일대 구글 어스 캡쳐 ) 따라서 북한 산림녹화를 위한 남북한 교류협력을 통한 방법과 정책면에서 고려되어야 할 것은 정부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먼저 전 국민적 공감대 형성이 우선 시 되어야하며, 이를 통해 정부는 북한당국과의 협력에 있어 일관성 있는 정책이 필요하다. 북한산림녹화사업간 엄격한 상호주의 적용인데. 북한은 우리와 이념과 체제에서 대결상태에 있지만 궁극적으로 협력의 대상이라는 점이다. 과거 서독이 동독과의 교류협력에 의해 공존했듯이, 남북한 역시 상생을 위한 서로 간의 신뢰를 통한 조화와 공존의 원칙 위에서 진행되어야 하며 일부의 목소리이지만 대북관계에 있어 조건 없이 지원해야 한다는 것은 가장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따라서 향후 북한 산림녹화 사업은 황폐지 조림과 산림소득 에너지 제공 및 농업 안정을 추진하는 패키지형 접근이 필요한 점을 인식하고 미리 준비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무관심하고 그 실태를 망각하는 사이 북한 삼림은 계속 황폐화될 것이며, 그 결과는 한반도 전체에 자연재해로 나타나고, 이는 곧바로 홍수와 산사태를 유발하며 막대한 양의 토사유출을 통해 농경지 침수와 산업 및 주택시설을 파괴하여 결국 식량과 에너지난을 가중시켜 다시 산림이 황폐화되는 악순환의 연결고리로 작용하고 있는 점을 주지해야 한다. 북한의 산림녹화 사업 준비는 조림사업과 산림소득을 연계시키고, 에너지 문제 해결과 농업안정을 통해 식량문제 해결을 동시에 추진하는 사업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를 위해 먼저 내부적으로 공감대를 형성하고 남과 북은 신뢰회복이 선행되었을 때 우리 모두가 지원세력으로서 남북 간의 교류와 협력에 한 발짝 씩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정부는 세부 지원 정책 수립과 주변국이 우리 남북문제 해결의 지원세력이 될 수 있도록 관련 정책의 추진과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본 글은 필자가 ‘The Korea Post’에 게재 했던 글을 최근 국내외 상황에 따라 주위 요구에 의해 수정 보완하였음을 밝힌다.
[힐링스토리] 현명함과 어리석음의 차이
[힐링스토리] 현명함과 어리석음의 차이
[정치닷컴/휴먼리더스= 김규남 논설기자] 겸청즉명 편신즉암(兼聽則明 偏信則暗), 여럿의 다양한 의견을 들으면 현명해지고 한쪽 의견만을 골라서 들으면 아둔해진다는 뜻이다. 어쩌면 입은 하나이고 귀가 둘인 것은 한마디 말하기에 앞서, 두 마디를 들으라는 것이 아닐까? [사진=김규남 논설기자] 우리가 당태종(太宗)으로 일컫는 이세민(李世民)은 수나라(581∼619)말 혼란기에 아버지 이연(李淵)을 도와 군사를 일으켜 관중(關中)을 장악한다. 이듬해 수나라는 ‘양제’에 이어 ‘공제’가 즉위하지만 그들은 폐하고 당(618∼907) 나라를 창업했다. 이세민은 당 고조 이연에 이어 626년 제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권력 쟁취를 위해서는 왕세자인 형과 동생을 처참히 살해하는 냉혈한이었다. 하지만 황제가 되고서는 언로를 개방하고 문을 숭상하며 인재를 적재적소에 등용했다. 이에 후대 사람들은 당 태종의 재위(서기 627∼649)시대를 ‘정관지치(貞觀之治)’라 하여 중국 역사에서 추앙하는 황금기로 평가받게 되는데 그 시기 이세민에게는 그의 귀를 열게한 위징(魏徵)이 있었다. 수나라 관리 위징을 사로잡은 이연은 그의 사람됨을 보고 장차 자신을 이어서 대를 이을 장자, 왕세자 건성에게 주어 수하가 되게 했다. 그 시기 세민이 수나라 잔당을 제압하며 큰 공을 세워 왕세자보다 더 위세를 떨치자 후일을 염려한 위징은 주군에게 동생을 죽이라고 사주하였다. 계획이 실행되는 과정에서 도리어 이를 간파한 세민은 아비에게 이 사실을 알려 크게 격노케 했다. 세민은 입궐하려는 형과 아우를 궁으로 들어오는 현무문에서 무참히 살해하였다. 당나라 2대 태종이 된 세민은 자신을 죽이라고 사주했던 위징이 그 당시 건성에게는 충성을 다하며 주군의 안위를 위해 멀리 내다보는 안목과 사람됨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 이후 대신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간의대부로 임명하였다가 나중에는 재상으로 중용했으며 심지어 그와 사돈을 맺으려고 할 정도로 신뢰했었다. 자치통감(資治通鑒)의 당 태종 2년 조(628년)에 나오는 군주의 나랏일 처리와 관련하여 태종과 위징이 주고받은 대화이다. 태종이 묻기를 “군주가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또한 일을 그르치게 처리하는 원인은 무엇인가?” 위징이 대답하기를 “여러 부류 사람의 생각을 들어보면 자연 스럽게 정확한 결론을 얻을 수 있지만 한쪽 말만 듣고 그것을 믿는다면 일을 그르치게 될 것입니다.” 이어서 역사적인 교훈을 예로 들면서, 군주의 독선적인 판단이 얼마나 큰 잘못된 결과를 초래하는지 설명했다. 이는 조직에서 사람을 쓸 때는 사사로움을 버려야 하며 중요한 일을 할 때에는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어 보고 판단해야 올바른 판단을 하게 되어 일을 그르칠 개연성이 적다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듣기 쓴 소리를 듣지 않는다면 좋은 말만으로 판단을 흐리게 하고 자신의 자리를 보전하려고 스스로 입을 닫을 것이다. 따라서 리더는 듣기 좋은 말로 아첨하는 자들을 멀리하고 여러 의견과 심지어 쓴 소리까지 들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위징 사후에 고구려를 정벌하고자했던 당태종은 안시성의 양만춘에게 쓰라린 패배를 하고 돌아가면서 ‘위징이 있었다면 이 전쟁을 말렸을 텐데’하며 뒤늦은 후회를 했다고 한다. 하여 오늘 ‘현명한 왕은 신하들의 입은 열게 하며, 자신은 귀를 열었다’는 경구를 반추해 본다.
[짧은 만남 긴 이별]  달뜨면 내가 보고 있는 줄 아시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긴다'
[짧은 만남 긴 이별] 달뜨면 내가 보고 있는 줄 아시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긴다'
[정치닷컴=김규남 논설위원] 1950년 6월 김일성에 의한 남침전쟁으로 ‘열흘 정도 훈련만 하고 바로 보내주겠다’는 말에 끌려간 남편은 북으로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갔다. 그것도 결혼한 지 여섯 달 만에 졸지에 닥친 일이라 신랑이 야속하다고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평생을 생과부로 살면서 그래도 견뎌낸 것은 신랑이 돌아오리라는 믿음 하나였으리라. 신혼집에 홀로 남겨진 새색시는 제 아비 얼굴도 모르는 아들을 둘러업고 삯바느질에 농사일에 가릴 게 없이 한 많은 65년 세월을 보내며 박복한 자신의 처지를 전생의 업(業)이려니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두 눈뜨고 버릴 수 없는 것이 사람 인연이었기에 때로는 지친 기다림에 산사람 놓고 제사도 지내봤지만 구멍 숭숭 뚫린 가슴은 메워지지 않았다고 한다. 드디어 6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남편이 살아있으며 만난다는 소식에 열아홉 결혼하던 날 보다 더 가슴이 콩닥거렸다는데 선심 쓰듯이 만들어준 2박 3일은 짧기만 했다. 여기저기 눈치 보면서 같이 한 대여섯 시간이 어쩌면 차라리 안 보는 것이 낮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야속한 시간은 쏜살같기만 했다. 다시 헤어지기 전, 질긴 인연의 세월을 거꾸로 돌리고 싶었는지 두 사람 이름 박은 시계 하나 신랑 손목에 채운다. 원수같이 더디기만 하던 세월이 요 며칠 게눈 감추듯이 휑하니 가버리고 이제 헤어지면 다시 볼 기약 없다고 생각한 팔순의 새색시, 울음 삼키며 ‘이제 우리 어떻게 해요?’ 한참을 망설이던 팔순 신랑, ‘달뜨면 내가 보고 있는 줄 아시게’하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긴다.서두르라는 안내원의 호통에 차에 오르기도 버거운 신랑을 바라보는 새댁, 푹 꺼진 가슴 더 내려앉아 망연자실 죄 없는 땅바닥만 두들겨 대고 있었다.
해불양수(海不讓水) 그리고 소망 - 욕심이라는 삶의 무게에 눌리고 시간에 쫓기다 보니 마음먹고 바다를 본적이 몇 번이던가?
해불양수(海不讓水) 그리고 소망 - 욕심이라는 삶의 무게에 눌리고 시간에 쫓기다 보니 마음먹고 바다를 본적이 몇 번이던가?
[정치닷컴=김규남 논설위원] '바다는 어떠한 물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뜻의 해불양수(海不讓水). 춘추시대 제(齊) 나라에서 '포숙아(鮑叔牙)'의 도움으로 환공(桓公)의 승상까지 한 관중(管仲)'의 업적을 기록한 '관자(管子)', '형세 해(形勢 解)'편에서 유래하는 경구이다. 강원도 고성 출장 길 점심 차 들른 식당가에서 바다를 본다. 오늘따라 잔잔한 바다는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아내와 함께 왔으면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바다와 멀리 떨어져 살아서인지 유난히 바다를 좋아하는 아내는 결혼 전 내 고향이 바닷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작정 결혼한 것은 아닐까? 언제인가는 결혼하면 바다를 자주 볼 줄 알았는데 도리어 결혼을 하고 바다에 갔던 기억이 손으로 꼽을 정도라던 투정이 갑자기 새롭게 들린다. 우리가 살면서 욕심이라는 삶의 무게에 눌리고 시간에 쫓기다 보니 마음먹고 바다를 본적이 몇 번이던가? 늘 바쁘다는 핑계로 바다는 고향 가는 길에 거쳐 가는 길목일 뿐 목적지가 될 수 없었다. 물론 결혼 전 자주 바다에 데려가겠다고 약속한 적은 없다 하지만 아내는 막연히 결혼하면 바다에 자주 갈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아 더 미안해진다. 바다는 가장 낮은 곳에서 모두를 받아들이는 세상에서 가장 큰 그릇이다. 바다는 큰물이든 작은 물이든, 더럽든 깨끗하든, 뜨겁든 차든 그 어떤 물도 가리지 않고 그저 그렇게 포용한다. 하루하루 더 팍팍해져 가는 세상에서 오늘처럼 이라도 바다를 보며 바다를 닮고자 했다면 우리의 삶은 더 풍요롭지 않았을까? 하여, 바다를 닮아 조금만 더 낮아지고, 조금만 더 베풀었다면 우리의 삶은 더 아름다웠을 것이다. 우리들을 행복하게 하고자 낮은 자세로 일하겠다던 정치인. 전부는 아니겠지만 그들이 과연 이념과 노선을 떠나 국가이익과 국민의 안위를 생각하는 정치를 하고 있는지 또한 해불양수(海不讓水)의 포용의 덕을 실천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이제는 양보하고 포용하는 정치를 통해 다양한 성향의 국민들을 하나의 목표로 결집시키는 정치인을 보고 싶다. 또한 그 힘을 한 방향으로 지향시켜 시너지를 창출하는 정치를 보고 싶다. 과거에 함몰되는 정치보다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언제나 넉넉히 모두를 받아들이는 바다를 닮은 어른스러운 정치를 보고 싶음은 우리 모두의 소망일 것이다. 이제야 돌아보면 어쩌면 결혼 후 바다를 자주 볼 것이라는 아내의 기대를 저버린 미안한 마음으로 이번 주말에는 아내와 바다에 다녀와야겠다.
[힐링스토리] 사람에게서 짐승의소리 (人頭畜鳴)라니
[힐링스토리] 사람에게서 짐승의소리 (人頭畜鳴)라니
[논설위원=김규남 박사] 기원전 221년 중국의 진왕 정(政)은 대륙을 통일하고 자신을 시황제(始皇帝)라고 칭했다. 진시황(秦始皇)은 재위10년 기간 동안 만리장성과 아방궁의 건설, 자신의 사후 궁전인 병마용갱(兵馬俑坑) 축성 등 많은 토목 공사를 벌였다. 또한 분서갱유로 악명을 떨치며 불사(不死)를 추구했지만 결국 다섯 번째 순행 길에서 객사했다. 환관 조고(趙高)와 승상 이사(李斯)는 권력의 라이벌 이었으나 진시황의 죽음을 감추고 권력을 공유하기 위한 조고의 음모에 이사가 결탁했다. 당시 진시황의 유언은 황위를 태자 부소(扶蘇)에게 물려주려고 하였으나 이 둘은 유서를 조작하고 현명한 태자 부소를 자결하도록 사주하였다. 그 이후 자연스럽게 멍청한 둘째 호해(胡亥)를 옹립하며 부소를 따르던 공신들을 무자비하게 도륙한 이후에야 결국, 호해는 진나라 2세 황제로 등극했다. 진시황본기에 의하면 공짜로 권력을 세습하고 황제로 등극한 호해 는‘황제란 눈과 귀, 그리고 마음과 뜻이 가는대로 할 수 있다는 사람이다’라면서 아비, 진시황이 추진하던 대형공사가 미처 끝나지 않았는데도 다시 아방궁 이전 계획을 추진하려 하였다. 이에 많은 신하들이 안된다 고 만류하자 호해는“내가 천하를 얻은 까닭은 내 맘대로 할 수 있기 때문 이다. 내 맘대로 하겠다는 데 무슨 말이냐.” 라고 했다. 공사의 진행 여부를 떠나 후일 사마천은 호혜가 한 말에 대하여 인두축명(人頭畜鳴)이라고 했다. 즉, '사람의 머리를 가지고 짐승 소리를 낸다'는 뜻으로 옳고 그름이나 나쁜 것을 분별하지도 못하면서 그저 입으로 소리만 지르는 꼴을 비유하였다. 입으로 내뱉는다고 전부 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머리(人頭)를 가지고 있으면, 사람의 소리(人鳴)가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는 세상에서도 때로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사람의 소리가 아닌 짐승의 소리가 들린다. 그들에 의해 진실이 왜곡되어 거짓이 판을 치고, 일부 패거리는 그것을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하면서 동원된 무지 몽매한 떼거리들은 즐기고 있다. 한편, 그럼에도 침묵하는 군상(群像)들은 사람의 입으로 짐승의 소리를 내고 싶지 않음이리라. 결국, 권력이란 부모와 자식 간에도 나눠가질 수 없다는 말이 있듯이 이사는 조고의 손에, 조고는 항우의 손에 죽으며 둘의 공생관계는 끝이 난다. 또한 짐승의 소리를 내던 진나라 2세 황제 호해의 제위(BC 210BC 207)는 종지부를 찍게 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황제가 되지 말았어야 할 호해와, 황제가 되었어야 할 부소를 회자한다.
(사)대한인터넷신문협회, '2018 공로상, 최우수기자상 및 우수기자상' 등 수상자 발표
(사)대한인터넷신문협회, '2018 공로상, 최우수기자상 및 우수기자상' 등 수상자 발표
[사진=기념사진] [정치닷컴/휴먼리더스=편집국] (사)대한인터넷신문협회는 협회 소속 회원사 대표를 대상으로 한 '2018 공로상 수상자'와 회원사 소속 기자를 대상으로 한 '2018 최우수기자상 및 우수기자상' 수상자를 6월5일 국회의원회관 제2소회의실에서 선정 시상했다. '대한인터넷신문협회 언론공로대상'은 협회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공로자에게 수여되며, '대한인터넷신문협회 언론인상'은 협회 언론환경 향상을 위해서 혁혁한 공을 세운 공로자에게 수여된다. 또한, '대한인터넷신문협회 공로상'은 협회의 권익보호에 앞장선 공로자에게 수여된다. 지난 2016년 '대한인터넷신문협회 언론공로대상' 수상자에는 조동환 약사공론 총괄국장, '대한인터넷신문협회 언론인상' 수상자에는 이서원 휴먼TV(정치닷컴 대표이사)가 각각 선정됐다. [2016년 5월 31일 한국프레스센터 20층 프레스클럽에서 개최된 '대한인터넷신문협회 창립 2주년 기념식 및 2016INAK사회공헌대상'시상식에서 협회 임원들이 기념촬영하고 있다] '2018 최우수기자상'에는 이채봉 세계타임즈 대표이사, 박명숙 경북IT뉴스 대표기자, 송종호 IBN한국방송 대표기자, 김헌수 환경법률신문 본부장, 이정우 대한인터넷신문 대표기자, 견재수 KJTimes 부장, 김경순 소비환경뉴스 국장, 권중호 코리아방송 대표기자, 우정자 경기매일 대표기자, 이평선 세종매일 대표기자, 이종엽 천안아산일보 대표기자, 김진구 전국뉴스 대표기자, 류광봉 PTB국민방송 대표기자, 서해 스타트업레이더 편집국장, 안영환 남동뉴스.(주)인천남동신문 대표기자, 이훈희 100뉴스 대표기자, 최재은 시사경인인터넷신문 대표기자, 신장호 여수인터넷뉴스 대표기자, 이청수 월드얀 기획취재부장, 조재현 KNS서울뉴스 대표기자, 김재하, 대한식품의약식품 대표기자, 김희철 강원인터넷신문 대표기자, 송기만 인터넷한국뉴스 대표기자, 김거수 충청뉴스 대표기자, 정성길 시사투데이 대표기자, 김은해 JMB방송 대표기자, 유혜련 레이디타임즈 대표기자, 안기한 시사우리신문 대표기자, 이규설 한국저널 대표기자, 김문교 CAM방송 대표기자, 백종구 세계환경신문 대표기자, 장현덕 스쿨iTV 대표기자, 정경화 동포투데이 대표기자, 김영달 한국요양신문 대표기자, 차효진 월드얀 경제부 차장, 박민근 스파크뉴스 대표기자, 김종주 티뉴스 대표기자, 한상희 소비자경제 대표기자, 신행식 대한연합방송 대표기자, 박현식 강원경제신문 대표기자, 고재철 한국사회적경제신문 대표기자, 오세광 충청제일뉴스 대표기자, 한상익 뷰티경제 대표기자, 이명수 (주)피디언 경제부 기자, 허중학 서울문화IN 대표기자, 황성한 예천인터넷방송 대표기자, 윤일권 글로벌뉴스통신 취재기자, 김규남 정치닷컴 취재기자, 박진아 시선뉴스 아나운서, 김재현 정치닷컴 취재기자 등이 최종 선정됐다. '2018 우수기자상' 수상자에는 이우진 약사공론 취재기자, 강현구 약사공론 취재기자, 심재민 시선뉴스 국회출입기자,한성현 시선뉴스 PD, 이연선 시선뉴스 CG담당 기자, 이호 시선뉴스 취재기자, 한월희 글로벌뉴스통신 취재기자, John Yoon 스타트업레이더 취재기자, 조종건 정치닷컴 기획취재기자, 장경욱 정치닷컴 편집기자, 이근식 대한식품의약신문 취재기자, 심동철 대한식품의약신문 기획취재기자, 권태순 티뉴스 취재기자, 김경배 티뉴스 기획취재기자, 원국식 티뉴스 사회부기자, 이현근 전국뉴스 문화부기자, 김진구 티뉴스 심층취재기자, 장장운 티뉴스 사회문화부기자, 권광혁 스쿨iTV 경북취재본부장,김지성 정치닷컴 취재기자 등이 선정됐다. 본지에서는 왕성한 취재 활동을 펼친 김재현 기자, 김규남 기자가 최우수 기자상을 수상하였다.
명태에게 배운다
명태에게 배운다
[정치닷컴=김규남] “길을 두고 뫼(山)로 갈까?”, 편한 길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불편한 길을 택한다는 말이다. 강원도 홍천을 지나 인제를 거쳐 속초와 고성으로 가는 여정을 떠올리면 ‘구불구불’한 길이 연상되었지만 요즘은 그 말도 옛말이다. 2006년 5월에 미시령터널이 개통되고, 2017년 6월 서울-양양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용대리 일대는 동해안을 거쳐 가던 길이 이제는 지나면서 바라보는 길이 되었다. 지난주에는 봄이 오는 강원도로 길을 떠났다. 으레 가던 고속도로를 피해 내비게이션도 끄고 옛 기억을 더듬어 인제에서 46번 국도를 향했다. ‘용대리. 언제부터인가 이 길을 지나다 보면 황태덕장은 새로운 볼거리였다. 식당 앞으로 길게 늘어선 차량들과 구수한 냄새로 길손을 잡던 황태요리는 최고의 먹거리였다. 용대리는 우리나라 황태의 약 80%가 만들어진다고 한다. 한 마리의 좋은 황태를 만들기까지 눈과 추위와 바람의 조화가 필요하며 준비과정도 필요하다. 봄에 캄차카 반도 인근 해역에서 잡은 명태는 동해안 지역에서 손질하여 급랭, 보관하다가 그해 12월이 되어 영하 10℃ 이하 기온이 지속되면 덕장에 내걸어 1~2월에는 눈을 맞으며 얼고 녹기를 반복하다가, 3월의 바람이 말려주면 명태는 질 좋은 황태가 된다. 명태의 화려한 변신을 보며 명태만큼 많은 이름을 가진 물고기가 있을까 생각해 본다. 명태(明太)를 먹으면 눈이 밝아진다고 해서 명태고 불렀다는 주장과 명태의 간으로 기름을 짜 등불을 밝히기도 해 명태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보다 통설로 여겨지는 것은 밝다는 의미와는 상관이 없이 함경북도 명천군에 사는 태씨 성의 어부가 처음 잡아서 지명과 어부의 성을 따와 명태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사실관계를 떠나 명태는 대구과에 속하며 한국 동해와 일본 러시아 해역에서 서식하는 한류성 어종이다. 명태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서 이렇게 다른 이름으로 불려지는데 잡는 시기에 따라 봄에 잡히면 춘태, 가을에 잡히는 추태, 겨울에 잡히는 동태, 잡은 장소에 따라 원양에서 잡히는 원양태, 근해에서 잡히는 지방태, 강원도에서 잡히는 강태, 잡는 방법에 따라 낚시로 잡는 조태와 그물로 잡는 망태라고 한다. 또한 건조 여부에 따라 잡은 그대로는 생태, 잡아서 얼리면 동태, 어린 명태를 말리면 노가리, 반 건조시키면 코다리, 완전히 건조시키면 건태(북어),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며 수분이 제거되어 살색이 황색으로 변하면 황태, 날씨가 너무 풀려 황태가 되지 못하면 먹태, 너무 추워 얼어버리면 백태, 몸뚱이가 부서져버리면 파태라고 한다. 한때 드넓은 바다를 가르며 거침이 없었을 텐데 알은 명란젓, 내장은 '창난젓', 아가미는 '명태 아가미 젓'이 되어 모두 내어준다. 어쩌면 보릿고개를 넘고 산업화 시대를 몸으로 맞선 우리네 어르신들이 살아온 이력처럼 모두 내어주는 명태에게서 또 하나를 배운다. 이제 3월의 덕장, 황태 걷힌 자리에는 봄이 걸리고, 모진 세월 견뎌낸 명태는 환골탈태하여 새로운 이름으로 우리의 밥상을 소담히 차려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