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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스토리] 제주 극락사 지운(志云)스님 , 인고의 시간을 담다
[힐링스토리] 제주 극락사 지운(志云)스님 , 인고의 시간을 담다
[정치닷컴/휴먼리더스=장경욱 편집기자] 현승(賢僧)의 붓이 물과 같이 흐른다. 그리고 자애로운 모습을 묘사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모습은 구체화하고 형상을 띠어 마침내 달마(達磨)의 이미지가 눈앞에 펼쳐진다. 주변의 흐름에 따라 고승이 잠사나마 속세와 경계를 긋고 작품에 몰두한다. 지운(志云)의 화풍은 이렇게 시작된다. [사진=지운스님] 구도를 향한 쉼 없는 붓 그를 찾는 구도자들이 많기에 지운의 행보에는 거침이 없다. 극락사의 그림에 나타난 붓의 시원한 획은 그의 가르침과 발걸음과 닮았다. 지운의 그림에는 거침과 부드러움, 그리고 뚜렷함이 있다. 획 속에 녹아든 삶의 교훈이 순간 속세를 잊게 한다. 또한 그림에 나타난 명확함과 여유로움은 그 때문일 수 있다. 속세에 머물되 이상을 담은 그림이 탄생하게 된 이유, 구도를 향한 붓의 움직임은 그렇게 현대인들에게 다가선다. 이미 속세와 연(緣)을 끊고 현재를 살기에 그의 그림은 미련 없이 떨어지는 폭포 소리 같다. 달리 보면 거침없는 물결 같이 가슴에 와 닿기도 한다. 선화(禪畵)가 삼독을 잡다 불교에서 일컫는 욕심과 화, 그리고 어리석음의 삼독(三毒)은 지운의 선화를 보며 수그러들게 된다. 욕심을 버리고 화를 누르고, 지혜를 찾아가는 길에 그의 가르침이 함께 한다. 지금껏 수많은 이가 제주 극락사의 그림을 그렸으며, 그 과정에서 깨달음을 얻고자 했다. 수행의 경지를 넘어서 결국 지혜와 진리를 얻었음에도 선화(禪畵)의 전승은 계속된다. 이 같은 이유로 지운 역시 멈추지 않고 속세를 향해 계속해서 현문(賢問)을 던진다. 지운이 그린 용(龍)의 풍모는 달마거사와 닮았다. 같은 눈빛과 같은 풍채, 그 상징하는 바도 유사하다. 흰색의 화지(畵紙)에 획이 그려지고 부분이 모여 전체가 되듯 지운의 손에게 시작한 작은 움직임은 결국, 깨달음을 향한다. 그 교훈에 조금이나마 다가설 수 있다면 그 시간은 결코 아깝지 않다. 달마의 꿈을 꾸며, 그 형상을 본이들은 절로 머리를 숙이게 된다. 이유야 다르겠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이 깊어서일 게다. 자연스레 마음을 평화롭게 하는 진리 화폭을 앞에 두고 지운이 붓을 드는 모습을 본적이 있다. 비록, 그의 그림은 길바닥에 있었지만, 무색(無色)의 화지에는 기다리던 그림이 눈앞에 펼쳐졌다. 경계를 넘어선 고승의 마음엔 이미 틀이 없고 얽매임도 없다. “자신이 지은 과오(過誤)를 부정하는 건 이기심의 발로(發露)”라 했던 지운은 여전히 그림을 보러온 이들에게 불교 공부를 권한다. 이 같은 방법으로 불심이 자신을 다잡고 마음을 평화롭게 한다는 진리를 자연스레 전한다. 여기에 그림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불교가 스스로를 닦는 공부라 여기는 지운은 수선(修善)의 과정을 매일 반복하며 그의 뜻이 그림에 배게 했다. 이런 이유로 달마를 보는 구도자들은 사색에 잠기게 된다.
[힐링스토리] 현명함과 어리석음의 차이
[힐링스토리] 현명함과 어리석음의 차이
[정치닷컴/휴먼리더스= 김규남 논설기자] 겸청즉명 편신즉암(兼聽則明 偏信則暗), 여럿의 다양한 의견을 들으면 현명해지고 한쪽 의견만을 골라서 들으면 아둔해진다는 뜻이다. 어쩌면 입은 하나이고 귀가 둘인 것은 한마디 말하기에 앞서, 두 마디를 들으라는 것이 아닐까? [사진=김규남 논설기자] 우리가 당태종(太宗)으로 일컫는 이세민(李世民)은 수나라(581∼619)말 혼란기에 아버지 이연(李淵)을 도와 군사를 일으켜 관중(關中)을 장악한다. 이듬해 수나라는 ‘양제’에 이어 ‘공제’가 즉위하지만 그들은 폐하고 당(618∼907) 나라를 창업했다. 이세민은 당 고조 이연에 이어 626년 제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권력 쟁취를 위해서는 왕세자인 형과 동생을 처참히 살해하는 냉혈한이었다. 하지만 황제가 되고서는 언로를 개방하고 문을 숭상하며 인재를 적재적소에 등용했다. 이에 후대 사람들은 당 태종의 재위(서기 627∼649)시대를 ‘정관지치(貞觀之治)’라 하여 중국 역사에서 추앙하는 황금기로 평가받게 되는데 그 시기 이세민에게는 그의 귀를 열게한 위징(魏徵)이 있었다. 수나라 관리 위징을 사로잡은 이연은 그의 사람됨을 보고 장차 자신을 이어서 대를 이을 장자, 왕세자 건성에게 주어 수하가 되게 했다. 그 시기 세민이 수나라 잔당을 제압하며 큰 공을 세워 왕세자보다 더 위세를 떨치자 후일을 염려한 위징은 주군에게 동생을 죽이라고 사주하였다. 계획이 실행되는 과정에서 도리어 이를 간파한 세민은 아비에게 이 사실을 알려 크게 격노케 했다. 세민은 입궐하려는 형과 아우를 궁으로 들어오는 현무문에서 무참히 살해하였다. 당나라 2대 태종이 된 세민은 자신을 죽이라고 사주했던 위징이 그 당시 건성에게는 충성을 다하며 주군의 안위를 위해 멀리 내다보는 안목과 사람됨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 이후 대신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간의대부로 임명하였다가 나중에는 재상으로 중용했으며 심지어 그와 사돈을 맺으려고 할 정도로 신뢰했었다. 자치통감(資治通鑒)의 당 태종 2년 조(628년)에 나오는 군주의 나랏일 처리와 관련하여 태종과 위징이 주고받은 대화이다. 태종이 묻기를 “군주가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또한 일을 그르치게 처리하는 원인은 무엇인가?” 위징이 대답하기를 “여러 부류 사람의 생각을 들어보면 자연 스럽게 정확한 결론을 얻을 수 있지만 한쪽 말만 듣고 그것을 믿는다면 일을 그르치게 될 것입니다.” 이어서 역사적인 교훈을 예로 들면서, 군주의 독선적인 판단이 얼마나 큰 잘못된 결과를 초래하는지 설명했다. 이는 조직에서 사람을 쓸 때는 사사로움을 버려야 하며 중요한 일을 할 때에는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어 보고 판단해야 올바른 판단을 하게 되어 일을 그르칠 개연성이 적다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듣기 쓴 소리를 듣지 않는다면 좋은 말만으로 판단을 흐리게 하고 자신의 자리를 보전하려고 스스로 입을 닫을 것이다. 따라서 리더는 듣기 좋은 말로 아첨하는 자들을 멀리하고 여러 의견과 심지어 쓴 소리까지 들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위징 사후에 고구려를 정벌하고자했던 당태종은 안시성의 양만춘에게 쓰라린 패배를 하고 돌아가면서 ‘위징이 있었다면 이 전쟁을 말렸을 텐데’하며 뒤늦은 후회를 했다고 한다. 하여 오늘 ‘현명한 왕은 신하들의 입은 열게 하며, 자신은 귀를 열었다’는 경구를 반추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