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시민단체와의 협치 확장성은 문재인 정부의 좋은 사례

기사입력 2018.02.12 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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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닷컴=장경욱]

 

2017년 3월 10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이르기까지 국민의 마음에 고통을 준 것은 ‘이게 나라냐!’였다. 

 

민정수석 우병우가 구속되고, 친박 실세 최경환이 구속되고, 3명의 국정원장 원세훈, 이병기, 남재준이 국가안보를 위한 국정원 특수 활동비를 사익추구로 구속되고, 대통령비서실장 김기춘이 구속되었다. 박근혜 정부의 부패로 구속자가 50명이 넘어선 국가 초유의 사태다. 이런 정도의 적폐 대통령이었으니 박근혜 대통령이 이명박 정부에 대한 부패 고리를 청산할 수 있었겠나. 이명박 스스로도 국민 앞에 진실을 밝히지 않아 대한민국 국민은 이명박에 대한 뉴스를 검색하고 유투브를 듣느라 밤잠을 설치니 얼마나 국민의 스트레스가 많겠는가. 결국 검찰의 칼끝이 이명박 대통령에게 향하고 있다.

 

 

지난 9년 동안 두 대통령이 만든 나라는 1% 강자를 위해 99%는 노예의 삶을 요구한 약탈사회였다. 자동차가 사람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동차를 피하며 길을 걸어야 하는 나라, 1급 발암물질을 뿜어내는 자동차보다 친환경 자전거를 도로에서 무시하는 나라. 정부의 발표는 국민이 신뢰할 수 없고 정부 실수에는 어느 공무원도 책임을 지지 않는 나라, 스타필드(starfield)와 같은 초대형 마트가 지역경제를 초토화해도 나만 생각하는 나라, 재난이 발생해도 신속하고 믿음직스럽게 처리하지 않는 나라, 서민은 지옥의 삶이고 집값 불안으로 투기가 횡횡하는 나라, 특권층은 부패의 전위대고, 서민이 사회봉사에 앞서는 나라, 공부가 아니라 좋은 직장 때문에 진학하는 나라, 대졸과 고졸의 차이가 사는 데 대단히 큰 영향을 미치는 나라, 학생들이 쓸모없는 지식으로 고생하고, 일부 잘난 아이들을 위한 공교육시스템을 가진 나라, 배부른 돼지가 되는 것이 인생의 목표인 양 질주하며 군림이 판치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12월 21일 29명의 사망자와 36명의 부상자를 낸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참사와 12월 26일 48명의 사망자, 144명의 부상자를 낸 밀양세종병원은 안전 우선은 뒷전이고 돈만 벌면 된다는 한국사회에 강자만 사는 부실의 총체성을 드러냈다. 두 사고의 경우, 스프링쿨러가 작동하지 않았다. 2009년 10층 이하 건축물의 경우, 스프링클러 설치 의무를 면제해준 것과 소방점검을 자체점검으로 규제를 푼 것은 이명박 정부다. 제천의 경우, 유독가스를 배출하는 배연시설이 작동하지 않은 것도 큰 화를 일으켰다. 20명이 목숨을 잃은 2층 여자 목욕탕 비상구에 창고가 만들어져 출구를 가렸다. 혁명에 가까운 도덕 규제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다.

 

 

그러나 놀랍게도 독일은 한국과 결이 완전히 다르다. 독일은 그저 잘 사는 나라, 제조업이 발달한 부자 나라가 아니다. 상식과 법치가 바로 서 있는 나라, 무엇보다 지도층이 깨끗한 나라이며 현명한 유권자 시민들이 있는 나라다. ‘아무리 위대한 물질문명도 그것을 받쳐줄 정신문명이 없으면 안으로부터 붕괴되어 있다’는 문명사가 토인비의 통찰을 잘 담아내는 나라가 독일이다.

 

 

이제 국민의 촛불시위는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했고 문재인 정부에게 적폐청산을 위임했다. 상식과 법치가 존중되는 독일사회와 같은 가치 실천을 위한 정부의 노련한 결기가 관건이다. 적폐청산을 위해 공공성으로 체화된 시민단체와의 협치 확장성을 제안한다. 120년 전 이상재의 통찰을 제안한다. 아래로부터의 개혁, 서민들이 본 상류사회 적폐를 면밀히 체크하는 개혁 말이다. 

 

120년 전 서재필, 윤치호와 함께 독립협회의 핵심인물 이상재는 정부주도가 아니라 시민운동을 통한 개혁의 가능성을 굳게 믿었다. 최초의 민간신문인『독립신문』을 한문이 아니라 한글로 발간한 것은 민중이 읽을 수 있는 글로 시민이 시민을 계몽하고 국내외 정세를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 또 주요 현안들에 대해서는 공개 토론회를 통해 시민에게 알리고 계몽을 주도했다. 

 

1898년 8개의 지방도시에 지부를 설치해 서울 중심의 엘리트 조직을 탈피한 시민운동이 되도록 확산했다. 만민공동회 의장 이상재가 1898년 10월 29일 제3차 만민공동의회를 주관할 때 당시 천민보다 더 못한 대우를 받고 혼인은 물론 같은 마을에서 생활조차 꺼렸던 백정 박성춘을 단상에 오르게 한 것은 신분제사회와 맞선 그의 사회개혁을 읽을 수 있다.

 

 

이상재가 시민운동의 중요성을 인식한 것은 그의 삶의 ‘결’과 같다. 그가 젊은 시절 경험한 것은 헬 조선이었고 이런 경험은 사회개혁의 동력이었다. 가난한 양반집에서 태어난 이상재는 1867년 18세에 과거에 응시했지만 실패했다. 벼슬집안과 재력 있는 집안 자녀들이 급제하는 뒤틀린 시대를 몸소 겪으며 다시는 과거 응시를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아무리 공부해도, 뒤틀린 사회에서 권력층의 혈연, 학연, 지연에 속하지 않고서는 출세의 길로 들어설 수 없는 절벽사회를 경험했다. 그러면서 그는 18세부터 13년간 실학의 범 개화 인사들과의 교류가 있었다. 또 1881년 박정양이 이끈 신사유람단(조사일본시찰단) 62명의 사절단 일원으로 일본의 근대화를 관찰했다. 또 1887년 박정양이 주미공사로 미국에 갈 때 서기관으로 1년을 미국에 체류하면서 미국의 민주주의를 경험했다. 1894년 정동구락부(정동클럽) 모임을 통해 서양외교관들과 선교사들과 조선개혁인사들과의 사교모임이 있었는데 이상재도 그 중심에 있었다. 

 

이상재가 시민운동을 통해 사회개혁을 이끈 것처럼 문재인 정부 또한 공공성으로 체화된 시민단체와의 협치로 나라다운 나라의 출구를 여는 것은 역사의 좋은 사례일 것이다. 

[장경욱 기자 infojc@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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