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 탐방] 실험적 작품들의 풍물굿 - 치고 두드리면 열릴 것이라

기사입력 2019.03.05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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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닷컴/휴먼리더스 = 심은영 기자]

 

 

'앞 사람이 나무를 심으면 뒷 사람이 그늘에서 쉰다'. 이것은 중국 격언이다. 누군가 맨몸으로 밀어붙여 인생의 전부를 걸고 일궈놓은 터전에서, 다른 누군가는 그 힘을 받아 가능태로만 존재하던 자신의 싹을 비로소 틔우며 튼실한 뿌리를 내려간다. 

(사)전통문화연구회 얼쑤(이하 '얼쑤')는 그렇게 선배와 후배가 스승과 제자로, 삶의 동반자로 자신들의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다. 얼쑤는 1992년 창단해 풍물 굿을 모태로 한 다양하고 실험적인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는 공연 단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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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사단법인 전통문화연구회 얼쑤]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난 광주에서 쇠를 치고 북을 두드린다는 것은 오랜 시기 동안 그 자체로 저항의 표시였다. 최루가스와 비명과 혈투가 난무하던 광장에서의 결집이 뜨거운 촛불의 축제로 모습을 달리해감과 동시에, 점차 악기를 때리는 행위도 단지 무언가를 향한 항거의 몸짓이 아니라 생명의 역동성에 대한 순수하고 격렬한 표현으로 인식되어질 수 있었다. 얼쑤는 전통을 기반 삼고 있으나 과거에 발목 잡히지 않고 동시대를 생생하게 자각하며 변화를 받아들이고 스스로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는 타악 작품들을 생산해낸다. MB와 박근혜 정부 시절 공연단체들에 가해진 혹독한 궁핍의 나날을 거치면서도 새로움에 대한 모색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사물놀이를 하면서 민소매와 반팔 등의 차림으로 복장을 파괴했고, 국내 최초로 모듬북과 사물악기를 결합한 작품 '모듬북과 사물놀이'를 만들어냈으며, 악기 개조와 개량에 대한 실험을 거듭한 결과 자동펌프를 연결한 물북 연주까지 선보였다. 얼쑤의 공연은 우리 고유의 신명을  현대적으로 탁월하게 재해석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물과 불, 바람 등 자연의 현상을 두드림으로 무대에 녹여낸 '인수화풍(人水火風)',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의 경계를 가로질러 퓨전 타악으로 절묘하게 직조해낸 '락의로(樂의路)'를 비롯해 넌버벌 타악 뮤지컬 '몽키즈'와 같은 얼쑤의 대표 프로그램들은 타악의 원초적 느낌을 세련된 리듬과 화려한 볼거리로 펼쳐내 관객들의 오감을 충만케 한다.

 

가까운 일본과 중국 초청 공연, 인도와의 문화교류, 영국 에딘버러페스티벌 참가 등으로 해외 각지에 우리 문화를 알렸으며, 악기와 함께 발길 닿는 곳이라면, 소리가 울려 퍼지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든 종횡무진 누비고 다닌다. 최근에는 미디어 아트와의 콜라보레이션 퍼포먼스로 부다페스트 세계수영선수권 대회 폐막 공연과 광주미디어아트페스티벌 개막 공연을 성공적으로 치러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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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듯 활발한 활동이 단원들의 무모한 열정만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얼쑤는 공연단체로서는 드물게 월급제와 주5일 출퇴근제를 도입하고 있다. 배고픔에 찌든 황폐한 예술가의 삶 보다는 조금 더 안정되고 건강한 토대 위에서 예술을 꽃피우는 삶을 바랐기 때문이며, 특정한 공연을 위해 얼마간의 기간 동안만 함께 연습하고 합을 맞추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여겨져서였다. 광주광역시무형문화재 제8호 광산농악 전수조교인 얼쑤의 김양균 대표는 같은 공간에서 같은 밥을 먹고 호흡해야, 꼭 같은 쪽으로 가지는 않더라도 방향은 비슷할 수 있으며, 더 좋은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얼쑤의 일과는 연습, 창작, 각자의 업무 진행 등으로 이뤄지며 여기에 텃밭 농사가 더해진다. 운 좋게도 얼쑤는 2002년부터 현재까지 폐교된 초등학교 건물과 부지를 사용하고 있으며 무성한 풀로 뒤덮인 채 방치되었던 흙밭을 기름진 땅으로 일구어냈다.

 

단원들이 손수 차려내는 얼쑤의 점심 밥상은 자신들이 직접 밭을 갈고 모종을 심고 잡초를 뽑아 거둬들인 알곡진 작물들로 풍성하다. 감자, 깻잎, 상추, 가지, 고추, 무, 마늘, 시금치, 고수, 배추...... 김장철에는 사흘 꼬박 담은 새 김치에 삶은 돼지고기와 막걸리를 곁들여 잔치를 벌인다. 이웃한 공예창작촌 작가들과 귀농학교 사람들, 광주 지역 공연 단체와 문화계 종사자들이 둘러앉아 김이 푹푹 나는 돼지고기에 맛깔난 김치를 찢고 곡주를 기울이며 깊어가는 겨울을 바라본다.


얼쑤는 비단 창작과 공연 활동에 국한된 타악그룹만은 아니다. 이들은 자생적 생활공동체를 꿈꾼다. 역사상 가장 나약한 종이라 일컬어질 만큼 외부에 대한 의존도가 높고 독립적인 생산 능력이 결여된 현인류를 길들여온 이 세계의 시스템에 저항하는 것이다. 갈수록 몸을 쓰지 않으려 하고, 몸을 움직이는 노동을 경시하는 이 시대에 내가 먹을 음식, 내가 사용할 물건은 내 몸을 움직여 생산해내며 이를 통해 삶을 능동적으로 되살리려는 것이다. 얼쑤의 김양균 대표를 비롯한 단원들은 개인의 생활은 그것대로 유지하되 지금의 세대와 후세대가 모여 서로 잘 하는 걸 가르치고 배움으로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며 공동창작 작업을 병행해가는 삶을 꿈꾼다. 자유로운 활동 속에 소비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 중이며, 신뢰를 바탕으로 이해관계의 충돌을 줄여 공동체의 기본을 공고히 해 가는 길에 대해 궁리하고 있다.


[심은영 기자 infojc@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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